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르네스트 르낭 (문단 편집) === 종교 논쟁 === 르낭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글을 써서 콜레주 드 프랑스의 히브리어 교수직을 얻으려고 했으나 이 책을 집필하기 전인 1862년 1월 11일 교수로 임명되었다. 그러나 2월 21일 취임강연에서 그는 17,18세기 프랑스 주교이자 역사가 자크 보쉬에의 말을 빌려 예수를 "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"이라고 지칭했다. 그는 이표현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했으나, 성직자들은 이 말의 무신론적 함축을 문제 삼았고, 결국 르낭의 교수 자격은 정지되었다. 르낭은 프랑스 제정 도서관의 직책 제의를 거절하고 몇 년 간 문필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. 그가 복직한 것은 1870년에 이르러서였다. 이런 사정 때문에 그는 교회에 더욱 반대하게 되었다. 그러나 그 전에 이미 그는 [[나폴레옹]]의 조카 마틸드 공녀의 살롱 같은 반정부 모임에 자주 참석했고 [[귀스타브 플로베르]], 샤를 오귀스탱 생트 뵈브, 이폴리트 텐, 공쿠르 형제 등 유명 문필가나 역사학자들과 교제하였다. 1863년 《예수의 생애》(Vie de Jesus)가 출판되었을 때 교회는 적의에 찬 비난을 르낭에게 퍼부었다. 이 책은 역사에 관한 르낭의 저작 중 최고는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있다.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성립을 대중적 상상력을 통해 '신화적'으로 설명하고 있는데다가 그의 다른 역사저술처럼 메시아주의 문학에 속하기 때문이다. 참고로 이 책은 도서출판창과 동서문화사에서 번역되어 국내 판매 중에 있다. 1864년 아내와 함께 소아시아를 여행한 후 연속물인 《그리스도교 기원사》의 일부로 《예수의 생애》를 뒤이은 《사도들》(Les Apôtres, 1866)과 《사도 바울로》(Saint Paul, 1869)를 펴냈다. 이 2권의 책은 소아시아 도시들의 불안정한 [[프롤레타리아]] 사이에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퍼질 수 있었는지를 탁월하게 묘사한 것으로서 그가 '19세기 지식인은 대중을 새롭게 계몽시킬 수 있을 것인가'하는 문제에 골몰했음을 보여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